자료/교육및강의 2009. 5. 21. 15:47
최양희
서울대 융합합과학기술대학원 원장

융합에 관한 관심이 어느 때보다도 높다. 지난해 11월 국가융합기본계획을 발표했던 정부는 최근 국가 발전의 화두로 그린융합을 추진하고 있다. 이는 융합이 신학문과 신지식을 창조하는 가장 좋은 수단이기 때문이다. 과학기술의 발전은 20세기 내내 높은 성장을 구가했으나 점차 둔화돼 가고 있다. 급증한 대학의 학과 수에서 보듯이 기존 학문을 세부적으로 분화함으로써 과학기술은 엄청난 진보를 해왔다. 그러나 세분된 전공 사이의 높은 장벽 때문에 더 이상의 발전은 어려움에 직면하고 있다. 이를 극복하는 최선의 방안은 학문 사이의 벽을 허물고 융합하는 것이다.

융합이란 두 가지 이상의 지식이 화학적으로 결합해 새로운 창조를 하는 것을 말한다. 여러 가지 기술을 단순히 결합하거나, 한 틀 내로 통합하는 것만으로는 융합이라고 할 수 없다. 세탁기와 건조기를 하나로 묶은 신형 세탁기는 두 기능을 통합만 한 것이므로 새로운 기능이 없다. 그러나 세탁기능과 인공지능, 나노기술을 융합한 신형 세탁기에서는 이전에는 불가능했던 저비용·초정밀 세탁이 가능하다. 융합에는 기술의 진보에 따라 자연스럽게 발생하는 것과, 의도적인 모험과 창의력으로 창조되는 것이 있다. 소프트웨어, 컴퓨터, 반도체로 대표되는 정보기술과의 융합은 자연스러운 진보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더욱 획기적인 창조는 상상을 뛰어넘는 이종 기술 간의 융합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다. 나노와 바이오의 만남, 에너지 기술과 생물학의 만남은 전혀 새로운 학문과 기술을 창조하며 신산업을 탄생시키고 있다.

융 합은 창의적이고 자유로운 마인드를 가진 연구자들에 의해 개발되며 상상력과 다학문적 지식에 기반을 두고 있다. 제조 중심의 2차산업, 서비스 중심의 3차산업에 이어 창조와 융합 기반의 4차산업의 시대가 열리고 있으며 이는 새로운 인재 모델을 필요로 하고 있다. 융합기술은 기존 학문 전문가가 단순히 다른 학문을 공부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융합기술의 기본 속성인 실험정신, 다양성, 유연성, 창의성은 학문지식이 많다고 저절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한국의 고등교육시스템이 낙후됐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전 세계 대학 순위를 보면 한국의 주요 대학은 한국의 경제력에 훨씬 못 미치고 있다. 고급 인재를 외국으로 빼앗기는 대학원 교육은 더욱 심각하다. 특히 융합의 거점이 돼야 할 한국의 주요 대학원을 보면 수십 년 전의 교육모델을 답습하고 있다. 학부와 대학원의 학과가 일렬로 세워진 환경에서 융합교육과 연구는 제대로 될 리가 없다.

무 엇이 개선돼야 하는가. 신학문의 창조라는 대학교육의 기본 목표로 돌아가야 할 것이다. 대학원은 학부의 연장에 머물지 말고 다양한 전공으로 재편돼야 한다. 창의성, 리더십, 모험정신을 강조한 커리큘럼이 학부에서뿐 아니라 대학원에서도 채택돼야 새로운 학문을 창조할 융합형 인재가 쉽게 길러질 것이다. 교수도 변해야 한다. 교수 자신이 이러한 변화를 먼저 받아들이고 실천할 때에 그 효과는 배가될 것이다.

세계적으로 융합의 연구가 가장 활발한 곳으로는 MIT의 미디어 연구소나 카네기멜론대학의 로봇연구소를 꼽는다. 이들은 모두 연구소에 교육기능을 더한 새로운 인재양성 모델로 유명하다. 최근 많은 대학에서 융합 전문학과나 대학원을 신설하고 있으나 근본적인 교육정책이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유능한 융합인재 양성은 요원하다. 새로운 조직, 새로운 문화, 새로운 커리큘럼으로 무장한 융합 교육 프로그램이 정부의 지원 아래 정착돼야 한다. 융합을 목표로 한 체계적인 고도의 교육훈련이 융합 인재 확보의 지름길일 것이다.

최양희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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